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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군정

오산리

오산리(吾山里)

읍내리 동쪽에 있는 법정리로 본래는 오산(鰲山)인데, 1914년부터 오산(吾山)이라고 한다. 지명과 관련하여 두 가지의 이야기가 전한다. 하나는 마을을 끼고 흐르는 남대천에 자라가 많아 붙였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고 하여 붙였다는 것이다.
오산리는 본래 신풍면과 북면의 접계 지역인데, 1914년 부내면의 오산과 왕정, 율속동을 병합하여 오산리라 했으며, 한 때 오산1리19)와 오산2리20)로 불리 우다가 1972년부터 다시 옛 지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 후 1981년 왕정마을에 속하던 밤숙골이 율속마을과 분리되었다.
동쪽은 장백리와 인접하고 남쪽은 남대천을 사이에 두고 당산리와 인접하며, 서쪽은 읍내리와 인접한다. 북쪽은 백하산(白霞山)을 경계로 충북 영동군과 도계를 이룬다.

오산(吾山·鰲山·吾茂)마을

임진왜란 전후 피난민이 정착하여 형성된 마을로 전해지고 있다. 장백리 쪽에서 내려오는 남대천이 마을의 동편을 끼고 남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크게 곡류(曲流)하여 ‘오무들’을 이루고, 다시 북쪽으로 휘돌아 오산삼거리에서 칠리대(七里台)를 지나 읍내로 들어간다.
본래 산의 모양이 큰 자라와 같다고 하여 ‘오산(鰲山)’, 산봉우리 다섯 개가 모여 있는 곳이라 하여 ‘오산(五山)’,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동네라 하여 ‘오무(吾茂)’라 했는데, 지금도 마을을 지나는 남대천변에 위치한 들을 ‘오무들’이라 부르고 있다.
마을에서 장백리 방향으로 가다 보면 용고개가 있는데, 여기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날들은 옛적부터 울창한 숲을 이루어 한 동안 황새떼들이 둥지를 틀고 살아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전쟁 이후 황새 떼가 자취를 감추면서 차츰 빈촌으로 변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마을에는 1966년 설립되었다가 폐교된 무주 동초등학교가 있으며, 1970년대에 전북제사무주공장(全北製絲茂朱工場)이 설립되어 멀리 강원도에서까지 취업차 온 사람들로 붐볐으나 시대의 흐름에 밀려 공장 문을 닫아 현재는 건물만 남아 있다.

왕정(旺亭)마을

오산 북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 성종 때부터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마을 어귀에 정자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는데, 숲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옛적에 스님 한 분이 마을 입구에 있는 용고개 마루턱을 오르다가 잠시 쉬면서 마을의 지세를 살폈다. 그는 부촌(富村)이 될 좋은 마을이라며, 나무를 심어 숲을 가꾸게 한 후 마을 이름을 왕정(旺亭)이라 지어 주었다는 것이다.
마을에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암석인 구상화강편마암(球狀花崗片麻岩)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데, 암석의 표면이 마치 호랑이 무늬처럼 생겨 호랑이 바위라 불리기도 한다. 또한 암석을 집에 갖다 놓으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오무 동북쪽에는 1955년 정부 보조로 정착한 왕정농원(旺亭農園)이 있었다.

율속(밤속골·밤수골·栗俗洞)마을

오무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밤나무가 많아 ‘밤속골(밤숲골)’로 불리 웠으며, 구읍지(舊邑誌)에는 부내면 율속동(府內面 栗俗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왕정마을과 함께 오산2리에 편제되었는데, 1981년 왕정마을에서 분리되면서 옛 지명인 율속(栗俗)으로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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