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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군정

용포리

용포리(龍浦里)

용포라는 지명은 부남을 거쳐 내려오는 금강물이 용처럼 꿈틀거리며 흐르는 곳으로 옛적에는 금산으로 건너가던 나루가 있던 곳이라 하여 지었다고 전한다.
용포리는 무주읍의 서남쪽에 위치한 법정리로 조선시대에는 서면에 속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무주면에 편입되었다. 그 당시 용포21)·공정(公正)·추동(楸洞)22)·잠두(蠶頭)와 요대(要垈)를 병합하여 용포리라 하였다.
그 후 용포1리23)와 용포2리24)로 편제되었는데, 1972년 용포1리의 원용포와 공정을 합해 공정마을이라 하면서 종전의 가래골을 추동마을로 이름하여 분리하고, 용포2리의 요대와 잠두를 각각 분리시켰다. 그 결과 용포리에 속한 행정분리는 공정과 추동, 그리고 요대와 잠두 등 4개 리로 나뉘게 되었다.
마을 동쪽은 가옥리와 인접하고 남쪽은 마향산을 경계로 적상면과 면계(面界)를 이루며, 서쪽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부남면과 면계를, 북쪽은 요대 뒷산에서 충남 금산군과 도계를 이룬다.

공정(公正)마을

용포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용포라는 지명을 가진 원용포마을과 공정골이 합병된 마을로 본래는 서면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무주면 용포리에 편제된 후 원용포·가래골(楸洞)과 함께 용포1리에 속하였고, 1972년 가래골과 분리되면서 원용포는 공정골과 함께 공정마을이 되었다. 원용포는 조선시대까지 지역의 중심지로, 본래 용포라는 지명을 가졌던 마을이다. 원용포(元龍浦). 늘목·가래골. 원용포·추동·공정. 요대·잠두

추동(楸洞)마을

용포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본래 ‘추자’ 즉 ‘가래나무’가 많은 동네라 하여 ‘가래골’로 불리웠다. 조선시대에는 서면에 속했고, 1914년 이후에는 용포1리에, 1972년 이후에는 추동라는 지명으로 불리우고 있다.
마을 동구인 늘목 옆에는 부남을 돌아 나온 금강이 서쪽에서 흘러나와 북쪽으로 곡류하며 서면마을 쪽으로 흘러간다. 일제 강점기 때 늘목에서 요대를 건너는 교량을 가설하여 용포교(龍浦橋)라 하였다. 다리가 가설되어 금산으로 연결되는 대로(大路)가 됨으로써 옛적에 서면으로 다니던 도로가 없어졌다.
마을에는 1947년 무주초등학교 용포분교장이 설립된 후 용포초등학교로 승격되었으나 현재는 폐교되었다. 가래골 서쪽이 되는 마을로 ‘내건너’가 있고, 가래골 동쪽이 되는 음지땀이 있다.

요대(要垈)마을

가래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적부터 본 군에 속하면서도 유일하게 금강 건너편에 위치하였다. 1914년 이후에는 잠두와 함께 무주면 용포2리에, 1972년 이후에는 잠두마을과 분리되어 요대마을로 불리우고 있다.
마을은 북쪽의 뒷산을 경계로 충남 금산군과 도계를 이루는데, 동·서·남쪽의 삼면이 모두 금강에 둘러싸인 특이한 지형으로 얼핏 보면 고립된 마을처럼 보인다.
그러나 옛적에는 ‘늘목’ 나루와 ‘소이진’ 나루가 모두 이 마을에 닿아 있었고,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서 큰물이 내려와도 금산을 왕래하던 행인들이 안심하고 건널 수 있었던 요긴한 땅이었다고 하여 요대라는 지명을 붙였다고 한다.
가래골 동북쪽에는 늘어진 목이라는 의미를 갖는 늘목마을이 있고, 늘목 동쪽에는 옹기점이 있었다는 옹기점터가 있다.

잠두(蠶頭)마을

황새목 북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인 조항산(鳥項山)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이 일곱 개의 봉(峰)을 이루며 마치 누에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은 본래 빈촌 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누에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부촌으로 탈바꿈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지형과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는 셈이다.

담당부서 :
무주읍 총무
연락처 :
063-320-5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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